[EXHIBITION] 박종영 Being MASTER 2016. 3. 9~ 4.18 통제·조종당하는 마리오네트 통해 현대사회 해부 전혜정 : 미술비평가 박종영의 마리오네트 작품들은 글자 그대로 ‘인형(人形)’이다. 각 부분을 실로 묶어 사람이 위에서 조종하는 인형을 가리키는 마리오네트(marionette)는 사람의 형상을 닮은 인형을 주로 지칭하지만 말, 소, 돼지 같은 동물들이나 움직이는 사물들 그 어떤 것도 대상이 될 수 있다. 사람을 꼭 닮은 얼굴의 마리오네트의 코에서는 어느새 피노키오처럼 코가 길어지기도 하고, 우리의 모습을 좇아 또렷한 눈동자를 굴려 내 모습을 쳐다보기도 하고, 눈을 감은 채 우리가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펄럭이며 움직인다. 어느새 긴 손가락을 움직여 무언가 줄 듯한, 아니면 받을 듯한, 손으로 말을 걸고 인사하는 제스처를 하기도 하고, 팔과 다리를 움직여 하늘로 날아오르거나 이제 막 의자에서 일어나거나, 걸어갈 듯, 생명을 부여받은 피그말리온(Pygmalion)의 조각상 갈라테이아(Galatea)처럼 살아날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박종영의 마리오네트들을 움직이는 것은 우리다. 마리오네트는 우리의 움직임과 작품 앞에 다가가면 감지되는 우리의 존재를 통해 활동성을 얻는다. (이는 작품에 장착된 센서나 작품 주변에 설치된 비디오 카메라와의 연동을 통해 구현된다.) 때로 우리는 인형술사(Puppeteer)가 되어 버튼 몇 개로 우리 자신의 크기와 비슷한 마리오네트를 직접 조종하기도 한다. 마리오네트를 만든 박종영은 동화 피노키오(Pinocchio)의 제페토(Geppetto) 할아버지이자 그리스 신화의 피그말리온이며, 우리는 피노키오와 갈라테이아의 신기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즐기는 관객이자 이들을 움직이는 인형술사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작가의 마리오네트들에게 피노키오의 푸른 요정이 되거나, 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가 되지 못한다. 작품들에게 진정한 생명력을 부여하지 못하는 것이다. 관객이 없을 때 이 마리오네트들은 다시금 고요한 침묵 속에서 예쁘긴 하지만 때로는 우리와 너무도 닮아 기이하게 느껴지는 인형의 모습으로 멈추어 서 있다. 이 마리오네트들은 우리가 조종한 의지대로, 때로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가 작품 앞에 나타나야만 우리의 존재를 감지하여 움직인다. 이들의 움직임은 관객과 ‘상호작용(interaction)’하지만 실상은 줄에 묶인 인형들의 처지처럼 우리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린 시절에 몰두했던 인형놀이, 로봇놀이, 자동차 경주놀이로 마음껏 장난감을 조종했을 때의 즐거운 쾌감과 박종영의 마리오네트들을 조종했을 때의 심정은 사뭇 다르다. 우리와 크기도 생김새도 비슷한 마리오네트들이 움직이는 모습은 신기하기도, 놀랍기도, 경우에 따라서는 기괴하기도 하다. 장난감 주인과 장난감이라는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우리와 마리오네트의 관계에서도 비슷하게 성립되지만 순진한 어린 시절 장난감을 조종했을 때의 기분 좋은 성취감이 박종영의 마리오네트를 움직였을 때의 형언할 수 없는 놀라움과 섬뜩함으로 바뀌는 것은 마리오네트가 우리를 너무도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마리오네트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리오네트는 우리의 거울이자 자화상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지배자’의 모습으로 마리오네트를 조종하고 있으면서도, 조종당하는 마리오네트를 보면서 ‘피지배자’인 우리의 모습을 함께 보고 있다. 이는 우리가 작품의 ‘지배자’이면서도 실제로는 우리 자신이 우리를 둘러싼 이 거대 사회 속에서 권력과 사회 구조의 ‘마리오네트’일 수 있음을 동시에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